살레시오동문회ㅣ모지웅 신부님

■ 살레시오고 11회동문회ㅣ살레시오고 서울동문회ㅣ살레시오고 총동창회

■ 모지웅(Jesus Miguel Molero Sanchez)

† 주님, 모지웅 신부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1928년 9월 30일 스페인, 톨레도 빌야돈파드리퀘 출생
1946년 8월 16일 첫서원(스페인, 모헤르난도)
1952년 4월 5일 일본 도착 .
1955년 12월 21일 사제서품(일본, 도쿄)
1956년 8월 13일 한국 입국
1964년 5월 서울 도림동 천주교회 주임
1971년 3월 로마 유학(영성신학 석사)
1973년 1월 29일 광주 신안동 공동체 원장
1978년 6월 18일 서울 신월동 원장
1983년 3월 18일 서울 대림동 원장
1984년 9월 19일 서울 돈보스코청소년센터 원장
1992년 1월 2일 서울 대림동 원장
1994년 8월 1일 대전 피정센터장
1998년 7월 1일 서울 성북동 원장
2000년 2월 1일 서울 돈보스코청소년센터 선교 담당
2008년 ~ 2017년 서울 대림동 거주(고해 사제)
2017년 ~ 2018년 서울관구관 거주
2018년 10월 18일 선종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 38)
살레시오회

서울신문 (2008-07-30  28면)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서울 영등포구 대림1동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은 소년원 수감생활을 마친 청소년들이 사회와 가정으로 복귀할 적응훈련을 받는 곳. 순간의 잘못으로 삶의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했지만 제자리를 다시 찾아가기 위한 마음을 다지고 방법을 배우는, 일종의 재교육장이다. 

이곳에서 늘상 ‘Be Happy’(행복하게 지내세요)를 입에 단 채 청소년들의 벗이요, 아버지로 살고 있는 벽안의 노사제가 있다. 80여명의 청소년들과 도예, 목공예를 함께하며 인생상담을 소임삼아 사는 5명의 신부 중 유일한 외국인, 모지웅(80·본명 Jesus Miguel Molero Sanchez·스페인) 신부.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설해 평생 가난한 청소년들의 후원자요, 버팀목으로 살았던 이탈리아 사제 요한 보스코(1815∼1888)의 정신과 삶을 한국에서 52년간 이어와 ‘한국의 작은 요한 보스코’로 통하는 이방인이다. 

●어딜 가도 “나는 모모신부” 자랑  

예보에 없던 장맛비가 줄기차게 쏟아지던 지난 24일 오후 대림동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

▲ 모지웅 신부님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할아버지들의 넉넉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은 모지웅 신부는 대뜸 성경을 펴들어 손으로 줄을 쳐내렸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복음 25장).평범한 성경 구절이지만, 평생 소외되고 뒤처진 젊은 영혼들의 어두운 길을 밝히는 등불로 살아온 노사제의 삶이 얹힌 때문인지 눈에 쏙 박힌다. 한국에 온 지 10여년쯤 됐을까. 한국의 대학생들이 우연한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 몰레로와 비슷한 한국의 성씨 모자를 따 장난삼아 지어준 별명‘모모 신부’ 를 본명보다 더 좋아하는 신부. 

처음엔 이름을 놀림감으로 삼은 게 기분나빴지만 나중에 대중가요‘모모’의 노랫말을 듣고는 ‘이것이 바로 나의 길’이라는 생각을 갖고 부터 어느 자리에서든“나는 모모 신부”라고 자신을 소개해왔단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곗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 앞에서 한 자의 틀림도 없이 ‘모모’ 노래를 유창하게 불러내는 노사제. 그는 정말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모모인 것일까.  


● 56년 입국 ‘작은 요한 보스코´로 살아    

스페인 톨레도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선교사의 꿈을 키우며 살았다는 모 신부에게 한국은 원래 ‘가고 싶지않은 땅’이었다. 어릴적 중국 선교사를 꿈꾸던 신학생 친척으로부터 중국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때문인지 중국을 향한 동경이 아주 컸다고 한다. 마드리드 살레시오회 신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도쿄 살레시오회 신학교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그때까지도 한국은“전쟁에 파묻힌 위험한 나라”일 뿐 결코 가고싶지 않은 곳이었다. 살레시오회 일본 관구장이‘한국엘 가보라.’고 거듭 권유해 반 강제로 한국 땅을 밟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마지못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 해 한강철교를 건널 때였어요.  스페인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이 불현듯 떠올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더군요. 폭격 맞아 엿가락처럼 엉긴 다리를 건너려는 개미떼 같은 피란민들…. 운명처럼 느껴지더군요.” 

1956년 8월13일 낮 12시15분.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시·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그 순간은 원치 않던 땅에서의 새 삶을 다짐한 회심(回心)의 찰나였음에 틀림없다. 사진으로 보았던 한강철교를 넘어 밤차로 광주에 내려가 살레시오 중학교 기숙사 사감을 맡은 게 ‘작은 요한 보스코’ 삶의 시작. 한국 청소년, 특히 어려운 환경의 젊은이들이 털어놓는 속 깊은 생각과 애환을 들어주며 자신도 모르게 요한 보스코가 되어갔다. 살레시오 중학교 교감, 살레시오 중·고교 서무과장,살레시오 중·고교 이사장 대리,서울 살레시오회 생활관장,살레시오회 공동체 원장,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원장,대전 살레시오회 생활관장…. 한국에서 52년을 사는 동안 서울 도림동성당·구로3동 본당의 주임 신부시절 6년과 이탈리아 로마 유학 2년을 합친 8년을 빼곤 모두 한국 청소년들의 곁을 지키며 살아온 셈이다. 

●학교 세워 어려운 청소년에 기술교육  

서울 도림동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해 가정형편상 중학교 문턱을 밟지 못한 이들을 위해 야간 중학교를 만들었고, 광주 살레시오 중·고교 이사장 대리시절엔 돈보스코 야간 중학교를 세웠다. 의지할 곳이 없거나 생활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받아들여 기술교육을 시켰던 돈보스코 청소년 센터 원장 재직시절엔 수용하고 있던 청소년들을 전원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진학시켜 어엿한 직장을 잡도록 주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원장 시절 겪었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불쑥 꺼내는 노사제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80년대 중반 간첩죄로 몰려 사형당한 아버지의 아들이 있었어요. 교도소에서 사형 직전 수녀에게 ‘내 아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지요. 아들을 우리 청소년센터에 들어와 살게 했는데 말을 끊고 혼자만의 생활에 빠져들었어요. ‘아들아 아들아’ 부르며 어렵게 말을 건넸지만 막무가내였는데, 어느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건네며 ‘아버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꺼내는 게 아닙니까.”

모 신부가 세워놓은 야간중학교며 청소년센터를 거쳐간 우리의 청소년은 얼마나 될까. 뜬금없는 질문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결혼 주례만 500번을 보았다.”는 말을 돌려준다. 커서 결혼을 한 뒤에도 배필과 함께 찾아와 자신을 부르는‘아버지’란 말에 미안하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다. “조금 더 잘해 줄 것을”. 가정의 행복과 부모의 사랑에서 멀었던 그들이 항상 행복하기를 기도한단다.  

●주례만 500번… 아버지라 부를때 뿌듯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 이런저런 상을 주겠다는 제의가 쏟아졌고 받았다. 국민훈장 석류장, 대한적십자 최고훈장인 ‘인도장’ 금장, 스페인 국왕 훈장에 명예 서울시민증도 받았다. 하지만“상패들이 어딘가 있을텐데…”하며 자랑삼지 않는다. 

“상을 너무 많이 받아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이 없을까봐 걱정”이라며 웃는다 ‘전 세계 12억명이 하루 1달러로 살고 있고 5∼17세의 2억 450만명이 노동을 하고 있는 세상’. 인터넷에서 찾았다는 자료를 내밀며 사제가 말한다. “부자들은 자신이 받은 것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결코 잊지 않아요.” 돈보스코 청소년센터에서 학생상담을 하던 일을 마지막으로 은퇴해 이곳으로 온 게 지난해 7월. 

은퇴했지만 여전히 바쁘다. 화·목요일 이틀은 서강대에서 스페인어·라틴어 강의를 해야 하고 성당들에서도 수시로 강의며 이런저런 도움을 청해온다. 중국 옌지의 국제합작기술학교(공업학교) 후원 책임을 맡아 학생들의 기숙사비며 장학금도 모금해 보내는 일도 큰 일이다. 가톨릭의대에 시신을 기증키로 약속했다는 노사제는 “내 껍데기를 세상에 돌려주는 게 내 일의 마지막”이라며 웃는다. 창문을 후려치는 빗소리가 팔순 노 사제의 목소리에 갇힌다. ‘Be Happy’. 어쭙잖은 기자의 이별사에 노 사제가 다시 성경을 펴든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장 13절).

글 사진 : 김 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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