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사님 코너

조선일보 (2011-06-01) 

▲ 공 수사는“이태석 신부는 돌아가셨지만, 그가 수단을 위해 세운 계획들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으로 하나하나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를 먼저 데려가시지…" 탄식한 '울지마 톤즈'의 공 야고보 수사
  이 신부의 모습 본 한국 사람들, 조건없이 수단 아이들 도우려 해
  중학교·병원 이어 고등학교 완성… 함께 꿈 꿨던 일 하나하나 이뤄져
   "이젠 하느님 뜻 알 것 같아…"
   "이제 더 이상 '왜 이태석 신부님을 먼저 데려가셨느냐'고 하느님께 묻지 않아요."                      

고(故) 이태석 요한(1962~2010) 신부에 대한 영화 '울지마 톤즈'에는 한국말로 "신부님 대신 칠십이 넘은 나를 데려가시지…"라며 탄식하는 이탈리아인 수사(修士)가 나온다. 한국에서는 '공 야고보 수사님'으로 불리는 지아코모 코미노(72) 수사다. 공 수사는 스물한 살인 1960년 한국에 왔다. 광주와 서울신길동의 살레시오회 수도원에서 아이들을 거둬 돌보고 공작기계인 선반(旋盤) 전문 기술을 가르쳤다. 선반기술을 갖고 있는 코미노 수사를 한국에 함께 온 수사들은 '공 수사'라 불렀다. 기술자를 낮춰 부르는 '공돌이'란 말에서 따온 것인데, 공 수사는 그 말이 좋았다.

한국에서 32년을 보낸 뒤, 1992년 공 수사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더 많은" 북(北)수단으로 건너가 다시 20년간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며 헌신했다. 그가 지난 6일 살레시오회 초청으로 20년 만에 한국에 왔다. 광주와 서울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태석 신부의 묘도 방문했다. 수단으로 다시 돌아가는 날인 30일, 서울 신길동 돈보스꼬 청소년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공 수사는 유창한 우리말로 "이태석 신부는 복음서 말씀 그대로 땅에 떨어져 죽으며 더 많은 열매를 맺은 밀알이었다"고 했다.

―'나를 먼저 데려가셨어야 했다'는 수사님 말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진심이었어요. 요한 신부님(이태석)에겐 많은 달란트(재능)가 있었어요. 음악, 언어, 의술, 친화력…. 또 나이도 저보다 20년 더 젊었어요. 근데 한국 다시 와 보니까, 하느님 뜻을 알겠어요. 더 이상 하느님한테 왜 그러셨느냐고 물어보지 않으려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제가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누구도 빈손으로 오지 않고 우리 수단 아이들 위해 조금이라도 도와주셨어요. 신자가 아닌 사람도, 이태석 신부님을 보고 돕고 싶은 마음을 냈다고 했어요. 참 아름다운 사랑이죠. 지금 수단에도 신부님 꿈꿨던 일들이 하나하나 이뤄지고 있어요."

―이 신부와는 언제 처음 만났나요.

"1999년이었을 거예요. 제가 수단에서 이탈리아로 잠깐 들어갔어요. 그때 요한 신부님은 신학생이었어요. 자기도 수단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신부가 되어 바로 남수단으로 왔어요. 당시 우리는 서로 만날 수가 없었어요. 남북이 전쟁했기 때문에. 하지만 2005년 휴전협정이 있고 많을 땐 한 달에 한두 번도 만났어요. 함께 미사도 드리고 앞으로의 일들도 의논하고."

―이태석 신부를 떠올릴 때 무슨 생각이 먼저 나세요.

"저는 요한 신부님의 아버지도 될 수 있는 나이예요. 그런데 때때로 제가 실망하고 계획대로 일 잘 안되고 그러면 신부님이 나보고 그래요. '마음 아프시겠지만 실망하지 말자, 같이 일하자, 같이 나가자'. 저에게 아주 큰 용기가 됐어요."

―이 신부가 가신 뒤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신부님이 중학교, 병원, 청년 교육 등을 다 시작했지만 고등학교는 완성되는 걸 못 봤어요. 근데 돌아가신 뒤에 바로 이뤄졌어요. 요한 신부는 톤즈뿐 아니라 틈틈이 남수단 곳곳을 다녔어요. 필요한 곳에다 학교·병원과 성당을 계획했어요. 특히 한국의 수단어린이장학회가 신부님 약속 이루기 위해서 아주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현지 상황이 어려운 데 비하면 건강해 보이십니다.

"실상은 그렇지 못했어요. 작년 7월 간염과 말라리아에 걸려 무슬림 병원에 입원했어요. 제가 처음 수단 갔을 때 데리고 있었던 '거리의 고아(street children)' 한 명이 문병 왔어요. '수사님 덕분에 나 이제 대학 졸업했고 군대 안에서 높은 사람이 됐다'고. '꼭 내가 책임지고 수사님 병 고치러 외국에 보내야겠다'고. 의사는 비행기 타고 가다 죽을 수 있다고 반대했어요. 하지만 그 장교가 책임지겠다고 서명하고 나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이탈리아로 실려갔어요."

―그런 건강 상태로 왜 또 수단에….

"석 달 뒤 수단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니 이탈리아 의사가 반대했어요. 또 가면 죽는다고. 하지만 '제가 건강이 되면 돌아간다고 주님한테 약속했습니다' 하고 갔어요. '건강 있는 대로 나 계속 수단에서 그곳 아이들을 돌보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어요."

공 수사는 "1년, 또 1년 하다 보니 수단에서도 어느새 20년이 됐다"며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했다. "이번에 수단을 떠날 때 학생들이 꼭 돌아오라고 부탁했어요. 서울 떠날 때도 한국 학생들에게 꼭 돌아온다고 약속했는데, 20년이 지났어요. 그래서 섭섭하면서, 기쁘게 돌아가요. 정말로 사랑, 가득히 받았어요. 용기, 그 전보다 더 많이 생겼어요." 

 이태훈 기자 libra@chosun.com

연합뉴스 (2011-05-31)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이태석 신부님이 한 알의 밀씨가 돼 많은 이들의 가슴에 사랑의 불을 놓고 있듯이 저 또한 수단의 가난한 젊은이들과 더불어 마지막 날까지 기쁘게 살다 가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가난한 이들과 32년간 함께 했던 천주교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 공 고미노(Giacomo Comino.72) 수사. 광주 수도원과 서울 신길동 수도원의 청소년 직업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다 '더 가난한 이들'을 찾아 1992년 아프리카 수단으로 떠난 공 수사는 현재 수단에서 19년째 가난한 아이들과 전쟁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한국 제자들의 초청으로 19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공 수사는 살레시오 수도회 잡지 '살레시오 가족' 7월호와 인터뷰에서 "지극히 관대한 많은 후원자들이 지속적으로 성모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으로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들을 많이 도와주길 당부한다"며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관심과 후원을 요청했다.

살레시오 수도회에 따르면 193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100km 떨어진 몬도비에서 태어난 공 수사가 한국에 온 것은 1960년. 당시 나이 21살이었다.

벽 안의 젊은이는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한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32년간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1992년, 공 수사는 한국처럼 '내전과 휴전,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를 가진 수단으로 홀연히 떠났다. 

남수단 톤즈에서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펼치다 숨진 고(故) 이태석 신부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역시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인 이태석 신부가 2006년 톤즈로 공 수사를 초대했으며 두 사람은 미사를 함께 드리며 형제애를 나눴다. 

공 수사는 이 신부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에도 출연, "젊고 재능 있는 이 신부 대신 칠십이 넘은 나를 데려간다면 기쁘게 갔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공 수사는 현재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며 지난해에는 악성 말라리아에 간염까지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당시 그는 수단 하르툼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우연히 병원을 방문한 군 장성의 주선으로 모국인 이탈리아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도움을 준 군 장성은 공 수사가 15년 전 거리에서 데려와 먹여주고 공부를 시킨 아이였다. 

공 수사는 그때 "만일 낫게 되면 다시 수단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느님께 약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약속한 대로 다시 수단으로 돌아와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고 있다. 
   yunzhe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