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현 글 a

■ 살레시오고 11회동문회ㅣ살레시오고 서울동문회ㅣ살레시오고 총동창회

■ 아프리카 케냐 원선오 빈첸초 도나티(Vincenzo Donati)

1996년 11월 통권 21호 [살레시오 가족]

[편집자 주] 아래 글은 1996년에 기록된 것으로, 거의 30년 전의 글입니다. 현재의 발전된 수단(SUDAN) 나라의 사정과는 너무 다르지만, 당시에 기록된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글 : 김미현 (살레시오 가족지)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성가 한 구절을 유행가 부르듯 흥얼거 리게 만든 주인공은 누굴까. 성가집에서 우리는 '원선오' 라는 이름을 종종 대하게 된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에 이런 작곡가가 있구나 하는 흐뭇함에 젖기도 한다는데, 바로 그 주인공은 국적을 말하기 힘든 원선오(68. 빈첸시오 도나티) 신부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그리고 다시 아프리카

원 신부는 1928년 이탈리아 중부 해변 도시 파노에서 태어났다. 워낙 가난한 집안이었기에 소년기에 제 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외삼촌이 살레시오수도회 신부였던 관계로 또리노 발도꼬의 오라또 리오에 오게 되면서부터 살레시오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게 되었다. 15살이 되던 해에 첫서원을 하고 몇 년간 사목실습을 한 다음 1950년에 일본 선교사로 파견 된다. 54년 일본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활동하다 8년 후인 1962년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서 20년 생활 중 대림동에서 산 1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19년 동안 광주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 그 후 1982년 당시 총장 신부였던 돈 비가노의 아프리카 프로젝트에 대한 호소를 듣고 홀연히 아프리카 케냐로 떠났다. 

그 때 원 신부의 나이 55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을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염려와는 달리 정작 자신은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일단 가고 보자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케냐에 도착하자마자 그 곳에도 엄청나게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만족할 수 있었다. 케냐에서 2년, 그리고 다시 수단으로... 
  
 원 신부는 '편하게 머무르고 싶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생각까지도 배제한 채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보다 험준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 다. 원 신부가 처음 일본으로 와서 그 곳에 안주하지 않고 다 한국으로 올 때, 그 당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막 전쟁을 치룬 혼란한 상황이었고, 아프리카에서도 역시 비교적 평온한 케냐에 안주하지 않고 전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휘말려 있는 수단으로 간 것이다. 

원 신부는 자신의 지난 세월이 일본에서는 아이들의 스승,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의 친구, 아프리카에서는 버림받은 이들의 아버지의 삶을 살았다고 회상한다. 돈보스꼬가 청소년들의 스승, 벗, 아버지임을 생각할 때 평생 돈보스꼬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온 살레시안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돈보스꼬의 생각, 돈보스꼬의 정신만이 저를 지탱하여 주는 지주입니다. 어느 나라는 어떤 상황이든 돈보스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가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 그 빛을 더 발한다.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아이들의 생활 속에서 그가 존재했다. 바로 살레시오의 생명인 청소년 가운데의 현존. 즉 이씨스텐자를 철저히 실천했던 것이다.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는 성무감실에 머물지 않고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뛰놀거나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청소 시간에도 아이들과 함께 청소하면서 생활 속의 작은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이들에게 심어주었다. 

이것은 학생과 같이 호흡하며 생활하는 돈보스꼬의 교육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누구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하기 위해서 꼭 무슨 말을 하거나 무엇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를 이해하기 위한, 다른 이를 사랑하기 위한 매우 간단한 방법은 그들 옆에 있어주는 것이다. 원 신부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 내려와 함께 생활하셨듯이 선생님도 아이들 가운데서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이는 자신의 옛 선생님들이 자기에게 교육했던 것을 그냥 따라하는 것일 뿐이라고 겸양되이 말한다. 

원 신부는 그의 교육비법인 친절함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는데 인간인 이상 때때로 인내심을 잃어버렸던 적도 있다. 그 때 원 신부는 자신의 허약한 모습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만일 다른 사람 앞에서 인내심을 잃었다면 그 즉시 사과하고 용서를 청했다. 이런 모습을 다른 이들은 겸손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게 원 신부의 생각이다. 인간 가운데서 인간이 되는 것을 원하는 그의 모습이 아마도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않았나 싶다. 

젊은이들의 음악적 영성을 불러일으킨 종교시간

원 신부가 한국에 처음 와서 눈을 뜬 새벽, 제일 먼저 들은 소리는 교회의 종소리였다고 한다. 이것은 원신부에게 있어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8년간 일본에 있으면서 한 번도 접할 수 없었던 반가운 것으로 마치 이탈리아 그의 고향 마을에 와 있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원 신부는 믿는 이들의 땅으로 자신을 이끈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활기찬 첫 햇살을 맞아 들였다. 

이런 한국인의 믿음의 심성을 더욱 불태우기 위해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살려 성가곡을 작곡한다. 당시의 성가들은 모두 어른들의 기준에서 만들어진 것들 뿐이었기에, 젊은이들의 영성을 깨울 수 있는 곡을 학생들의 기호에 맞게 만들고 여기에 성서 구절의 가사를 넣으므로 젊은이들 사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기존의 성가들이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졸기 좋은(?) 박자인데 반해 원 신부의 '우리와 함께 주여', '사랑이 없으면', ' 엠마우스' 등의 노래는 학생들이 즐겁게 부르면서 성서 내용을 음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원 신부의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학생들은 노래를 불렀고, 그 가사 내용이 자연스레 학생들의 심성으로 녹아 들었던 것이다. 

노래 '임 쓰신 가시관'으로 잘 알려진 신상옥씨는
 “원 신부님은 우리나라 70년대 대중가요를 많이 들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대중가요를 이해하고 그 위에 자신의 음악을 곁들이셨어요. 저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원 신부님의 음악만 듣고 신부님이 우리나라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로 원 신부님은 우리나라의 음악과 정서를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라고 말한다. 
  
학생들이 따분해 하는 종교시간을 음악적 영성으로 채우고, 한국인이 아니면서 누구보다도 한국을 이해한 사람이다. 원 신부의 노래는 부르는 흥겨움 뒤에 그 목적이 야무지게 드러난다. 그것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결국 원 신부의 학생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원 신부의 음악적 영성을 통한 종교 시간은 아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이 함축적으로 어우러지는 사랑의 송가이다. 

원 신부는 생활 자체로도 학생들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줬는데, 그건 바로 청빈의 삶이다. 한 번은 광주 수도원 원 신부 방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 도둑은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방 구석구석을 뒤져봤지만 훔칠만한 값비싼 물건이 없자 방주인만 원망하며 나가다 붙잡혔다고 한다. 원 신부의 가난한 삶이 빚은 불쌍한(?) 도둑 이야기다. 그릴 수밖에 있는 것이 계란 꾸러미나 속내의 같은 선물이 들어오면 원 신부는 수도원 옆 판잣집을 찾아가 모두 나눠줬다. 

또 지금은 다이어트한다고 안 먹는 청소년들이 있는데 원 신부가 가르칠 당시엔 점심을 굶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때는 학생들의 여린 가슴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학생들을 조용히 식당으로 데려가 함께 식사를 하였다. 
“가난한 청소년들이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했을 때 우리가 이를 갖고 있다면 줄 수 있겠고 없으면 줄 수가 없다. 하지만 있으면서도 이를 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물건에 애착을 가지면 가질수록 청소년들과 이를 나누기가 어려워질 것이고, 그러면 결국 우리는 그들과 벌어질 수밖에 없다. 물질적인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것들은 우리 마음과 활동을 제약한다." 
이것은 원 신부의 청빈에 대한 지론이다. 

지금은 사랑에 목말라하는 수단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있는 원 신부는 살레시오회가 운영하는 '성 요한 기술학교'에서 청소년들의 자립의 길을 도와주고 있다. 수단의 수도인 카르툼(Khartoum) 인근에 몰려 있는 약 2백만 명의 난민들은 보통 이틀에 한 번 옥수수나 단감자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성요한 기술학교의 난민촌 학생들에게도 학교에서 주는 점심 한 그릇이 유일한 하루 식사다. 끊임없이 도움을 줘야 설 수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원 신부는 느낀 점이 많다.

"줄 것이 없어도 달라고 달라고 하면 줄 것이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들의 애기를 들어줘도 줄 물건이 없다는 결과는 같아서. 겉으로 보기엔 아이들을 도와주지는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저의 맘속에 이들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이들도 그걸 느끼죠." 
  
지난 10월 4일 다시 아프리카로 향하는 원 신부의 바람은 많은 동문들이 진정한 살레시안으로 살면서 살레시오 일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졸업생들은 살레시오의 귀중한 일꾼들이고, 세상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돈보스꼬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밀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평신도인 살레시오 가족을 기르는 데는 학교만큼 유리한 것이 없다. 살레시오의 복음전파는 교육과 함께 수행하는 것인데 한국에는 살레시오 남녀 중고등학교가 단 하나밖에 없어 아쉬움이 많다. 케냐의 경우 순전히 졸업생들에 의해서만 운영되는 살레시오 학교가 4 군데나 있다면서 원 신부는 아프리카에서 가 능한 일이라면 한국에서도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살레시오 학교를 세우고 운영할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말한다. 
  
한국의 나쁜 점이나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한 물음에
"지금 내가 한국에 발붙이지 않고 떠나서 한국의 나쁜 점을 말할 자격이 없다"며 고개를 흔든다. 

이런 원 신부의 삶은 하느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삶과 같이, 하느님이란 목표를 향하면서 주님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하나의 도구가 되어 라고 응답하는데…. 지금 일흔이 다 되어 가는데도 어디론가 다시 떠나야 된다면 기꺼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는 쉼 없는 열정을 뿜어낸다. 
  
아프리카에서 남은 여생 가득히 돈보스꼬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갈 원 신부의 훈훈함이 한국의 가을을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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